← 소식·기록로 돌아가기

기사·기고 / NA:NNAL STORIES

문이 열려도 건너갈 사람이 없다

남북 대화가 끊긴 시간에도 인도협력의 사람과 경험을 지켜야 한다는 관점에서 민간단체의 활동과 정부 지원의 방향을 살핍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10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제는 경제적인 접근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 우선과제로 대두됐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까지는 신한반도 경제지도 구상처럼 남북이 공동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안이 남북관계의 한 축이었다. 그러나 지난 7년 동안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 정 장관의 판단이다. 경제협력에 앞서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하고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장관이 제시한 해법은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대화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제안했던 4자회담을 다시 시작할 조건이 마련됐다고 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회담에 시동을 거는 국면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동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통일부의 처지는 이해할 만하다. 남북 당국 간 대화가 끊긴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북한의 선택을 직접 바꿀 수단은 많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하기 어려운 행보를 지켜보면서도 북미회담 가능성을 붙드는 이유일 것이다. 통일부는 민간단체처럼 활동 지역을 옮겨가며 관계가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조직도 아니다. 정부는 결국 공식 대화와 협상의 통로를 찾아야 한다.

경제적 이익만으로 과거 민주정부 시절의 남북관계를 되살리기 어렵다는 진단에도 동의한다. 다만 4자대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이 지금 가능한지, 북미회담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는 더 따져볼 문제다.

그 논쟁에 앞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회담이 열릴 때까지 남북 사이에서 일해온 사람과 그들이 쌓은 경험은 누가 지킬 것인가.

막힌 뒤에도 계속된 연탄 나눔

9일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가 진행한 '2026년 제2차 남북 인도협력 아카데미'에서 원기준 따뜻한 한반도 사랑의연탄나눔운동 사무총장의 강연을 들었다. 이 아카데미는 남북 인도협력의 역사와 주요 쟁점, 분야별 협력 사례와 실무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이 단체는 북한의 추운 지역에 연탄을 보내는 사업을 해왔다. 그러나 2010년 5·24 조치 이후 북한으로 연탄을 보낼 길이 막혔다. 단체는 국내 에너지 취약계층 지원을 확대하고 중앙아시아와 중국 연변으로 활동 지역을 넓혔다.

원 사무총장은 연변 동포 가운데 북한에 가족이나 친지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을 설명했다. 연변에서 진행한 활동에는 그들을 통해 북한으로 향하는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려는 뜻도 있었다고 했다.

이는 제재를 피해 물자를 북한에 보내려 했다는 말이 아니다. 북한에 직접 닿을 수 없는 동안에도 다시 만날 가능성까지 끊지 않으려 했다는 뜻에 가깝다. 연탄을 보낸 곳은 달라졌지만 겨울을 견디게 한다는 일과 북을 향한 관심은 남았다.

이런 선택은 한 단체만의 것이 아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북한 어린이의 보건과 영양을 지원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남쪽에서 평화교육과 시민활동을 이어왔다. 샘복지재단은 대북 보건의료·영양 지원을 준비하면서 연해주 고려인 지원과 교육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국제푸른나무도 북한 장애인 재활 지원과 남북 장애인 교육·문화 교류를 중심에 두고 활동해왔다.

단체마다 활동 분야와 방식은 다르다. 그러나 북한에 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조직의 목적과 경험을 완전히 접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쪽에서 평화교육을 하고, 다른 지역의 동포와 취약계층을 돕고, 언젠가 재개될 협력을 준비했다.

북한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고 해서 그동안 쌓아온 사람과 기술, 문제의식까지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와 민간은 서로 다른 시간을 견딘다

통일부가 북미회담과 4자대화를 붙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북 대화가 끊기고 대북제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좁기 때문이다. 국제정세의 변화를 살피며 공식 협상의 계기를 찾는 것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민간단체 역시 막힌 길을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와 민간이 찾는 길은 성격이 다르다. 정부에는 법과 제도를 바꾸고 예산을 집행하며 공식 회담을 제안할 권한이 있다. 민간단체가 대신할 수 없는 역할이다.

반면 정부 조직의 시간은 예산과 인사, 정권 교체에 따라 흐른다. 사업에는 집행 근거가 필요하고, 투입한 예산에 상응하는 성과도 보여줘야 한다. 관계가 끊긴 기간에 눈에 보이는 결과 없이 사람과 접촉 경험을 붙들어두는 일은 정부가 지속하기 어려운 이유다.

민간단체에는 공식 대화의 문을 열 권한이 없다. 대신 상대를 대하는 방식과 지원 물자의 구성, 분배 확인, 대북 반출과 제재 절차, 북측 협력자와의 신뢰처럼 문서만으로 남기기 어려운 경험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공개적인 성과가 없는 시기에도 조직의 목적을 유지하고 다음 만남을 준비할 수 있다.

정부가 민간보다 부족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두 주체가 할 수 있는 일과 견뎌야 하는 시간이 다르다는 뜻이다. 정부는 문을 열 수 있고, 민간은 문이 닫힌 동안 다시 만날 준비를 이어갈 수 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대신할 수 없다.

남은 단체들만 보고 안심할 수 없다

활동 지역을 옮겨 목적을 이어온 사례는 희망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은 단체들만 바라보면 민간이 어려움을 스스로 이겨냈다는 착시가 생긴다. 민간단체들은 그 시간을 가까스로 버텨왔다. 적지 않은 단체가 후원과 인력을 잃었고, 활동을 사실상 중단했다.

민간단체의 어려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5·24 조치 이후 대북 인도협력 사업이 위축되면서 활동을 중단하거나 규모를 줄인 단체가 나타났고, 현장에서 일하던 활동가들도 하나둘 떠났다. 이후 남북관계의 단절이 장기화하면서 대북 인도협력 자체가 크게 위축됐다.

최근 남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가 '인도적 협력 30년 구술기록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오랫동안 현장에서 활동한 이들의 경험을 기록해 다음 세대로 남기겠다는 것이다.

구술기록 사업 자체가 민간단체의 위기를 보여주는 통계는 아니다. 다만 오랜 현장 경험을 가진 활동가들의 기억을 별도로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 만큼 세대교체와 경험의 단절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는 점은 보여준다.

사람이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직원 한 명이 줄어드는 일이 아니다. 북측과 협의할 때 어떤 표현을 조심해야 하는지, 지원 물자를 어떻게 구성하고 포장해야 하는지, 제재와 반출 절차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분배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확인해왔는지가 함께 사라진다. 후원자를 설득하고 관계기관과 협의해온 경험도 잃게 된다.

회담이 열린다는 발표만으로 그런 능력이 되살아나지는 않는다. 단절된 신뢰와 경험은 예산을 편성한다고 곧바로 복구되는 자산이 아니다.

보내지 못할 때에도 지원해야 한다

정부의 민간단체 지원은 대체로 실제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물자가 반출되고 사람이 오가며 사업을 진행할 수 있어야 예산을 투입할 명분도 생긴다. 반출과 접촉이 멈추면 지원할 사업도 줄어든다.

통일부의 민간단체 지원도 이런 단절의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상근 활동가를 유지하고 과거 사업의 자료를 정리하며 후속 세대를 교육하는 일도 지원 대상에 포함할 필요가 있다. 대북제재와 반출 절차, 회계와 분배 확인에 관한 전문성을 축적하고 제3국과 접경지역의 협력망을 관리하는 일도 인도협력의 기반으로 인정해야 한다.

지원이 민간단체의 독립성을 해쳐서는 안 된다. 정부가 정한 정책을 홍보하거나 집행하는 조직으로 만들면 민간이 가진 긴 호흡과 신뢰도 함께 사라진다. 정부의 정책 방향과 달라도 현장에서 얻은 판단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활동의 목적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정 장관이 말한 북미회담은 4자대화와 평화체제 논의를 다시 시작할 계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대화가 시작된다면 정부는 공식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회담 뒤의 인도협력은 다시 현장에서 움직여야 한다.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는지, 무엇을 약속했고 어디서 실패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통일부가 해야 할 일은 민간단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하기 어려운 일을 오랫동안 맡아온 이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이다. 문이 닫혀 있을 때 사람과 경험을 지키지 않으면, 문이 열려도 건너갈 사람이 없다.

오마이뉴스 원문 읽기

← 소식·기록로 돌아가기새 소식 신청